제6장 예정론

Chapter 6 Predestination

원리강론

고래(古來)로 예정설(豫定說)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성도(聖徒)들의 신앙생활의 실제에 적지 않은 혼란을 일으켜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그러한 결과를 가져왔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성서에는 인생의 영고성쇠(榮枯盛衰)와 행·불행은 물론 타락인간의 구원(救援) 여부와 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하여 되어지는 것으로 해석되는 성구가 많이 있다.


그 예를 들면, 로마서 8장 29절 이하에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 이를 부르시고, 부르신 이를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를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고 하셨다. 또 로마서 9장 15절 이하에는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하였으며, 로마서 9장 21절에는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고 하였다. 그뿐 아니라 로마서 9장 11절 이하에는, 하나님은 복중(腹中)에서부터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시어 장자(長子)된 에서는 차자(次子) 야곱을 섬기리라고 한 말씀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완전예정설(完全豫定說)을 세워줄 수 있는 성서적인 근거는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예정설을 부정할 수 있는 또 다른 성서적인 근거도 많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 를 들면, 창세기 2장 17절에 인간조상의 타락(墮落)을 막으시기 위하여 '따먹지 말라'고 권고하신 것을 보면, 인간의 타락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예정에서 되어진 것이 아니고, 인간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치 않은 결과였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한편 또 창세기 6장 6절에는 인간 시조(始祖)가 타락한 후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創造)하신 것을 한탄하신 기록이 있는데,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하여 타락되었다면 하나님 자신의 예정대로 타락된 인간을 두시고 한탄하셨을 리가 없는 것이다. 또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救援)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바로 멸망으로 예정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 구나 잘 알고 있는 성구인 마태복음 7장 7절에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찾는 자에게 만나게 하시며,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보면, 모든 성사(成事)가 하나님의 예정으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으로 좌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예정으로만 되어진다면 무엇 때문에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실 필요가 있겠는가?


또 야고보서 5장 14절에 환중(患中)에 있는 형제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는 것을 보면, 병이 나거나 낫거나 하게 되는 것도 역시 모두 하나님의 예정에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불가피한 운명으로 결정지어지는 것이라면 인간이 애써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종 래의 예정설(豫定說)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기도나 전도나 자선 행위 등 인간의 모든 노력은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아무 도움도 될 수 없고 전혀 무의미한 것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절대자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라면 그것도 역시 절대적이 것이므로, 인간의 노력으로 변경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와 같이 예정설을 둘러싸고 찬 반 양론이 모두 세워질 수 있는 성서의 문자적인 근거가 충분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교리의 논쟁은 피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가 원리(原理)로써는 어떻게 해결될 것인가? 예정론에 대한 문제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제1절 뜻에 대한 예정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정(豫定)을 논술하기 위하여, 우리는 여기에서 '뜻'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하 나님은 인간의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이루지 못하셨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들을 놓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어디까지나 이 창조목적을 다시 찾아 이루시려는데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뜻은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 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은 이러한 뜻을 예정하시고 그것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창조목적을 이루시려는 뜻을 세우셨으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루지 못하셨던 그 뜻을 다시 이루시기 위하여 그것을 다시 예정하시고 복귀섭리를 하시는 것이다.


그 런데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이 뜻을 선(善)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셔야 하며, 악(惡)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실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의 주체(主體)이시므로 창조목적(創造目的)도 선이요, 따라서 복귀섭리의 목적도 어서 그 목적을 이루시려는 '뜻'도 선이 아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조목적을 이루시는 데 반대되거나 장애가 되는 것을 예정하실 수는 없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이나 타락인간에 대한 심판이나 혹은 우주의 멸망 등을 예정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악의 결과도 하나님의 예정으로 되어지는 필연적인 것이라면 하나님은 선의 주체라고 할 수 없으며, 자신이 예정하신대로 되어진 악의 결과에 대하여 후회하셔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하 나님은 타락된 인간을 보시고 한탄하셨고(창 6 : 6), 또 불신으로 돌아간 사울 왕을 보시고 그를 택하셨던 자신의 일을 후회하셨던 것이니(삼상 15 : 11), 이것은 그것들이 모두 예정으로 되어진 결과가 아니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악의 결과는 모두 인간 자신이 사탄과 짝함으로써 그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못한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목적을 다시 이루시려는 뜻을 예정하심에 있어서 그것은 어느 정도로 예정하시고 이루시는 것인가?


하 나님은 유일(唯一)하시고 영원(永遠)하시며 불변(不變)하신 절대자이시므로, 하나님의 창조목적도 역시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목적을 다시 이루시려는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뜻도 유일하고 불변하며 또한 절대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뜻에 대한 예정 또한 절대적일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사 46 : 11). 이와 같이 뜻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시기 때문에, 만일 이 뜻을 위하여 세워진 인물이 그것을 이루어 드리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은 그의 대신 다른 인물을 세워서라도 끝까지 이 뜻을 이루어 나아가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예를 들면, 아담을 중심하고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이루려 하셨던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이 뜻에 대한 예정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후아담으로 보내시어 그를 중심하고 그 뜻을 다시 이루시려 하셨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이 뜻도 역시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전편 제 4장 제 1절 II), 예수님은 재림하셔서까지 이 뜻을 기필코 완수하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이다(마 16 : 27).


또 하나님은 아담가정에서 가인과 아벨을 중심한 섭리로써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세우려 하셨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이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 대신 노아가정을 세우시어 이 뜻을 이루려 하셨던 것이다. 나아가 노아가정이 또 이 뜻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대신으로 아브라함을 세우시어 기필코 그 뜻을 이루셔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또 아벨로써 이루시지 못한 뜻을 그 대신 셋을 세우시어 이루려 하셨고(창 4 : 25), 또 모세로써 이루어지지 않은 뜻을 그 대신 여호수아를 택하여 이루려 하셨으며(수 1 : 5), 가룟 유다의 반역(反逆)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던 뜻을 그의 대신 맛디아를 택하시어 이루려 하셨던 것이다(행 1 : 25).


제2절 뜻 성사에 대한 예정


창 조원리(創造原理)에서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인간이 그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함으로써만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목적을 다시 찾아 이루시려는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뜻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인간이 관여할 수 없으나, 그 뜻 성사에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책임분담이 가담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러므로 아담과 해와를 중심한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사실상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않는 것으로 그들에게 맡겨진 책임분담을 그들 자신이 완수함으로써만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창 2 :17) 따라서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는데 있어서도, 그 사명을 담당한 중심인물이 그 책임분담을 수행함으로써만 그 뜻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도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을 완성하시기 위하여는 유대인들이 그를 절대로 믿고 따라야 할 것이었는데, 그들이 불신으로 돌아감으로써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뜻 성사는 부득이 재림 때에로 미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 러면 하나님은 뜻 성사에 대하여 어느 정도로 예정하시는 것일까? 이미 위에서 논급한 바와 같이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려는 뜻은 절대적인 것이지만 그 뜻의 성사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실 95퍼센트의 책임분담에 그 중심인물이 담당해야 할 5퍼센트의 책임분담이 가담되어서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예정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 5퍼센트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분담에 비하여 극히 작은 것임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 자신에 있어서는 100퍼센트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에 대한 예를 들면, 아담 해와를 중심한 '뜻 성사'는 그들이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않는 것으로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함으로써 되어지도록 예정하셨던 것이다. 노아를 중심한 복귀섭리도 노아가 방주(方舟)를 제작하는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으로 그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정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도 타락인간(墮落人間)이 그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것으로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비로소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요 3 : 16). 그러나 인간들은 이 작은 책임분담마저 감당치 못함으로써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연장케 하였었다.


한 편 또 야고보서 5장 15절에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마가복음 5장 34절에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하신 말씀이 있으며, 마태복음 7장 8절에서는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다. 이러한 성구(聖句)들은 모두 인간 자신의 책임분담 수행에 의하여서만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정되었다는 사실을 증시(證示)한 것이다.


그 리고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의 인간이 담당했던 책임분담은 하나님이 그의 책임분담으로 담당하신 수고와 은사에 비하여 얼마나 미소(微小)한 것인가를 알 수 있는 동시에, 다른 한편 섭리적 중심인물들이 그들의 책임분담을 감당치 못함으로써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연장시켜 왔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 경미(輕微)한 책임분담이 인간 자신에 있어서는 얼마나 힘에 겨울만큼 큰 것이었던가 하는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제3절 인간에 대한 예정


아 담과 해와는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들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함으로써 선의 인간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가 인간조상이 되는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실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도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어떠한 인물이 된다는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러면 하나님은 인간을 어느 정도로 예정하시는 것인가? 어떤 인물을 중심한 하나님의 '뜻 성사'에 있어서는 그 자신이 언제나 인간 책임분담(責任分擔)을 해야만 된다는 필수적인 요건이 따라다닌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인물을 어떠한 사명자(使命者)로 예정하시는데 있어서도, 그 예정을 위한 95퍼센트의 하나님의 책임분담에 대하여 5퍼센트의 인간 책임분담 수행이 합하여서 그 인물을 중심한 뜻이 100퍼센트 완성됨으로써만 그러한 인물이 될 수 있도록 예정하신다. 그러므로 그 인물이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예정하신대로 인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예 를 들면, 하나님은 모세를 택하실 때에 그가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선민(選民)을 가나안 복지(福地)까지 인도할 수 있는 영도자(領導者)가 되도록 예정하셨다(출 3 : 10). 그러나 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반석(磐石)을 두 번 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될 때에 그 예정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도중에서 죽고 말았다(민 20 : 7∼12, 20 : 24, 27 : 14).


한 편 하나님이 가룟 유다를 택하실 때에도, 그가 충성으로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함으로써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예정하셨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에 그 예정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는 도리어 반역자(反逆者)가 되고 말았다.


또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세우실 때에도,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모시어 맡겨진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영광의 선민(選民)이 될 수 있도록 예정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줌으로써 이 예정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그 백성은 쇠퇴해 갔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예정에 있어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중심인물(中心人物)이 될 수 있는 조건은 어떠한 것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 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은 타락된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세계에로 완전히 복귀하시려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기의 차이는 있으나 타락인간은 누구나 다 빠짐없이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벧후 3 : 9).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가 그러했듯이 그의 재창조역사(再創造役事)인 구원섭리도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전체적인 것으로 넓혀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그러하기 때문에, 구원섭리를 위한 예정에 있어서도 먼저 그 중심인물을 예정하시고 부르시는 것이다.


그 러면 이렇게 부르심을 받는 중심인물은 어떠한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가? 그는 먼저 복귀섭리를 담당한 선민의 하나로서 태어나야 하며, 다음으로는 같은 선민 중에서도 선(善)의 공적이 많은 선조의 후손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똑같이 선의 공적이 많은 선조의 후손이라 하더라도 그 개체가 뜻을 이루는데 필요한 천품(天稟)을 타고나야만 하는 것이며, 또 같은 천품의 인간이라 할지라도 이를 위한 후천적인 조건이 모두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후천적인 조건마저 똑같이 갖춘 인물들 중에서도 보다 하늘이 필요로 하는 때와 장소에 맞추어진 개체를 먼저 택하시는 것이다.

제7장 기 독 론

구 원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타락인간들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중심한 예수와 성신(聖神)과의 관계, 예수와 성신과 타락인간과의 관계, 중생(重生)과 삼위일체(三位一體) 등 기독론(基督論)에 관한 제 문제(諸問題)이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이 문제에 관한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문제에 대한 미해결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교리와 신앙생활에 적지 않은 혼란을 일으켜 왔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는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의 가치가 어떠한가를 알아야 하므로, 이에 관하여 먼저 논한 다음에 위의 제 문제를 다루기로 하자.


제1절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의 가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 즉 완성한 아담의 가치를 우리는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논하여 보기로 하자.


첫 째, 하나님과 완성한 인간을 이성성상적(二性性相的)인 관계로서 논하여 보자.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아서 마음과 몸으로 창조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과 완성한 인간 사이에도 이성성상적인 관계가 있으므로, 이 관계는 인간의 마음과 몸과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무형(無形)의 마음을 닮게 하여 그의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창조된 것이 몸인 것과 같이, 무형의 하나님을 닮게 하여 그의 실체대상으로 창조된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완성한 인간에 있어서의 마음과 몸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하나가 될 때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 완성한 인간이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이루어서 일체가 되면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완전히 체휼하는 생활을 하게 되므로 그 관계는 분리하려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와 같이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이 항상 거하실 수 있는 성전(聖殿)이 되어(고전 3 : 16) 신성(神性)을 가지게 된다(전편 제 1장 제 3절 II).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인간은 하늘 아버지의 온전함과 같이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마 5 : 48). 그러므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적인 가치를 가지게 된다.


둘 째, 인간 창조의 목적을 중심하고 그 가치를 논하여 보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을 통하여 기쁨을 누리시고자 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딴 사람이 가지 수 없는 특성을 각각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수가 아무리 많이 번식된다 하더라도 개성이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게 마련이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내재(內在)하고 있는 어떤 개성체(個性體)의 주체적인 이성성상(二性性相)에 대한 자극적인 기쁨을 상대적으로 일으켜 드릴 수 있는 실체대상은, 그 이성성상의 실체로서 전개된 그 한 개성체밖에는 없는 것이다(전편 제1장 제3절Ⅱ). 그러므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 우주간(宇宙間)에 있어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인 것이다. 석가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원리로 보아서 타당한 것이다.


셋 째, 인간과 피조세계(被造世界)와의 관계로 본 그 가치를 살펴보자. 우리는 창조원리에 의한 인간과 피조세계와의 관계를 앎으로써 완성한 인간의 가치가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영인체(靈人體)로는 무형세계(無形世界)를, 육신(肉身)으로는 유형세계(有形世界)를 각각 주관하도록 창조되어 있다. 그러므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전 피조세계의 주관자가 되는 것이다(창 1 : 28). 이와 같이 인간에게는 육신과 영인체가 있어서 유형 무형 두 세계를 주관할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두 세계는 인간을 매개체로 하여 서로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실체대상의 세계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우 리는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여, 인간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을 실체로 전개한 것이 피조세계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영인체는 무형세계를 총합한 실체상(實體相)이요, 그 육신은 유형세계를 총합한 실체상이 된다. 그러므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천주(天宙)를 총합한 실체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을 소우주(小宇宙)라고 하는 이유는 실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천주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 예수님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씀하신 것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천주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 령 여기에 하나의 완전한 기계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이 기계의 모든 부속품들이 이 세상에 단 하나씩밖에 없는 것이어서 더 이상 구할 수도 없고 만들 수도 없다고 하면, 그 하나 하나의 부속품은 아무리 보잘 것 없이 작은 것이라도 전체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완성한 인간의 개체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미미(微微)한 것 같다 하다라도 실상 전천주적(全天宙的)인 가치와 대등하다고도 볼 수 있다.


제2절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과 예수님


I. 생명나무 복귀로 본 완성한 아담과 예수님


인 류 역사는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렸던 생명나무(창 3 : 24)를 역사의 종말의 세계에서 복귀하여(계 22 : 14)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려는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역사인 것이다. 우리는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창 2 : 9)와 종말의 세계에서 복귀되어질 생명나무(계 22 : 14)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앎으로써, 완성한 아담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타 락론(墮落論)에서 이미 상론(詳論)한 바이지만, 아담이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남성이 되었더라면 그가 바로 창세기 2장 9절의 생명나무가 되어, 그의 후손도 모두 생명나무가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하여 이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창 3 : 24), 타락인간의 소망은 바로 이 생명나무로 복귀되는데 있었다(잠 13 : 12, 계 22 : 14).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그 자신의 힘으로써는 도저히 생명나무로 복귀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 반드시 창조이상을 완성한 한 남성이 생명나무로 오셔 가지고 만민으로 하여금 그에게 접붙임을 받도록 해야만 되는 것이다.


이 러한 남성으로 오실 분이 바로 요한계시록 22장 14절에 생명나무로 표상(表象)되어 있는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로 상징되어 있는 완성한 아담이나 요한계시록 22장 14절에 생명나무로 비유된 예수님은,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남성이라는 견지에서는 서로 다를 것이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따라서 창조본연(創造本然)의 가치에 있어서도 그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II. 창조목적의 완성으로 본 인간과 예수님


우리는 이미 본장 제1절에서 완성한 인간의 가치가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완성한 인간과 예수님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하는 점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우 리가 상술(上述)한 바에 의하여 아는 바와 같이, 완성한 인간은 창조목적(創造目的)을 두고 보면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여서(마 5 : 48) 하나님과 같은 신성(神性)을 가진 가치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의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지음 받은 인간도 역시 완성되면 영원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 위에 완성한 인간은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이며 전피조세계(全被造世界)의 주인이기 때문에, 그가 없이는 천주(天宙)의 존재 가치도 온전해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천주적인 가치의 존재인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가치를 가지고 계신 분이다. 예수님이 지니신 가치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위에서 열거한 바와 같은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이 가지는 가치 이상의 것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 오신 분이심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원 리(原理)는 이제까지 많은 신도들이 믿어온 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는 신앙에 대하여 이의(異議)를 갖지 않는다. 왜 그러냐 하면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임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 원리가 예수님을 말하여, 그는 창조목적을 완성한 하나의 인간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의 가치를 추호도 격하(格下)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창조원리(創造原理)는 완성된 창조본연의 인간의 가치를 예수님의 가치와 동등한 입장으로 끌어올리는 것뿐이다.


우리는 위에서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이라는 것을 논술하였다. 그러면 이제 이것을 입증할 수 있는 성서적 근거를 찾아보기로 하자.


디 모데전서 2장 5절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로마서 5장 19절에는 한 사람(아담)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예수님)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 고린도전서 15장 21절에는 사망이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예수님)으로 말미암는도다라고 표명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17장 31절에는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라고 하였고, 누가복음 17장 26절에는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성서는 어디까지나 예수님은 인간이시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인류를 중생(重生)하여 주실 참부모로 오시는 분이기 때문에 사람으로 오시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III. 예수는 하나님 자신이신가


빌 립이 예수님에게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아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 14 : 9∼10)라고 대답하셨다. 또 성경의 다른 곳에 세상은 그(예수님)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 1 : 10)라고 한 말씀도 있고, 또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예수님)가 있느니라(요 8 : 58)고도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성구 등을 근거로 하여서 이제까지의 많은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창조주(創造主)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위 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과 일체이시기 때문에 그의 신성(神性)으로 보아 그를 하나님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자신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는 마음과 몸과의 관계로 비유하여 생각할 수 있다. 몸은 마음을 닮아 난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서 마음과 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제2의 마음이라고는 할 수 있을망정, 몸이 마음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제2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하나님 자신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요한복음 14장 9절내지 10절의 말씀대로 그를 본 것은 곧 하나님을 본 것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말씀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뜻에서 하신 것은 아니다.


요 한복음 1장 14절에는 예수님을 말하여 말씀이 육신을 이루신 분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의 실체로서 도성인신(道成人身)하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3절을 보면 만물세계는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나아가 요한복음 1장 10절에는 이 세상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을 창조주(創造主)라고도 볼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 런데 창조원리에 의하면, 피조세계(被造世界)는 개성을 완성한 인간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을 실체로 전개한 것이기 때문에,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피조세계를 총합한 실체상(實體相)이요, 또한 그의 화동(和動)의 중심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 세상은 완성한 인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님은 인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여 완성되면 그 인간에게 하나님의 창조성을 부여하시어, 그로 하여금 만물세계에 대한 창조주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해 주시고자 하셨던 것이었다. 이러한 각도에서 볼 때, 요한복음 1장 10절의 기록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은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 뿐이요, 그가 곧 창조주 자신임을 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예 수님은 혈통적으로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그는 전인류를 중생(重生)하여 주실 인간조상으로 오셨기 때문에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브라함의 선조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 8장 58절에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도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의미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예 수님은 지상에 있어서도 원죄(原罪)가 없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는 우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인간이었고, 또 부활 후 영계에 있어서도 제자들과 다름없이 영인체로서 계신다. 다만 제자들은 생명체급(生命體級)의 영인으로서 빛의 반사체(反射體)로 있는 데 비하여, 예수님은 생령체급(生靈體級)의 영인으로서 찬란한 빛을 발하는 발광체(發光體)로 계시는 것이 다른 점이라 하겠다.


한 편 또 예수님은 부활 후에도 영계에서 지상에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하고 계신다(롬 8 : 34).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라면 자신에게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는가? 이 문제에 있어서는 예수님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어 스스로 하나님이 아니심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마 27 : 46, 요 17 : 1).


만 일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이 사탄의 시험을 받고 또 사탄에 몰려 십자가에 달리는 등의 일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또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 : 46)라고 하신 말씀을 보더라도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 아님은 분명한 것이다.


제3절 타락인간과 예수님


타 락한 인간은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자기보다 저급하게 창조된 천사(天使)를 우러러 볼 정도로 천한 자리에 떨어져 버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모두 갖추고 계셨기 때문에 천사를 비롯한 모든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고 15 : 27). 한편 타락인간에게는 원죄가 있으므로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원죄가 없기 때문에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아무런 조건도 없는 것이다.


그 리고 타락인간은 하나님의 뜻과 그의 심정(心情)을 알 수 없다. 혹시 그것을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극히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완전히 아시고 또 그 심정을 체휼하는 자리에서 생활하고 계시는 것이다.


따 라서 인간은 타락된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이지만, 참부모 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중생(重生)하여 원죄를 벗고 선의 자녀가 되면, 예수님과 같이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 복귀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 인간 사회의 부자간(父子間)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서차(序次)가 있을 뿐 그 본연의 가치에는 추호의 차이도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러므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고(엡 1 : 22), 우리는 그의 몸이 되며 지체(肢體)가 된다(고전 12 : 27). 따라서 예수님은 본성전(本聖殿)이요 우리는 그의 분성전(分聖殿)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의 가지이며(요 15 : 5), 한편 돌감람나무인 우리는 참감람나무 되시는 예수님에게 접붙임으로써 참감람나무가 될 수 있는 것이다(롬 11 : 17).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 하셨고(요 15 : 14), 또 그(예수님)가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을 줄을 안다(요일 3 : 2)고 한 성구도 있다. 그리고 성경은 오직 예수님은 처음 익은 열매요 우리는 다음 익은 열매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고전 15 : 23)


제4절 중생론과 삼위일체론


삼 위일체론(三位一體論)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학계에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로 논란되어 왔다. 그리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실상 그 근본적인 뜻을 모르는 채 그대로 지내왔던 문제 중의 하나가 역시 본항에서 다루려는 중생론(重生論)인 것이다.


I. 중생론


1. 중생의 사명으로 본 예수와 성신


예 수님은 자기를 찾아 온유대관원 니고데모에게 중생(重生)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3 : 3). 중생이라는 말은 두 번 태어난다는 뜻이다. 그러면 인간은 왜 중생해야 되는 것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타락인간(墮落人間)이 중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알아보기로 하자.


아 담과 해와가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하여 인류의 참부모가 되었더라면, 그로부터 태어난 자녀들은 원죄가 없는 선한 자녀가 되어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여 인류의 악의 부모가 되었기 때문에 악한 자녀들을 번식하여 지상지옥(地上地獄)을 이룬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대로, 타락한 인간들은 원죄가 없는 자녀로서 두 번 태어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를 낳아 주는 것은 부모가 아니면 아니 된다. 그러면 타락한 우리들을 원죄(原罪)가 없는 자녀로 다시 낳아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 줄 수 있는 선한 부모는 누구일 것인가?


원 죄 있는 악의 부모가 원죄 없는 선의 자녀를 낳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선의 부모가 타락인간들 가운데서 있을 리는 만무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부모는 하늘로부터 강림(降臨)하셔야 하는데, 그렇게 오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따라서 그는 타락한 자녀들을 원죄가 없는 선의 자녀로 다시 낳아 지상천국을 이룩하시기 위하여 참아버지로 오셨던 분이시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1장 3절에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중생)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는 말씀이 있다.


예 수님은 아담으로써 못이루셨던 참아버지로 오셨기 때문에 성경은 그를 후아담이라 하였고(고전 15 : 45), 영존(永存)하신 아버지라 하였으며(사 9 : 6), 또 하나님은 선지자(先知者) 엘리야를 다시 보내시어 그로 하여금 타락한 인간들의 마음을 부모로 오시는 예수님 앞으로 돌이키게 함으로써 그들로 자녀가 되게 하시겠다고도 말씀하셨다(말 4 : 6).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시리라(마 16 : 27)고 하셨다.


그 런데 아버지 혼자서 어떻게 자녀를 낳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타락한 자녀들을 선의 자녀로 다시 낳아 주시기 위하여는 참아버지와 함께 참어머니도 계셔야 하는 것이다. 죄악(罪惡)의 자녀들을 다시 낳아 주시기 위하여 그 참어머니로 오신 분이 바로 성신(聖神)이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성신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요 3 : 5)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 와 같이 성신은 참어머니로서 후해와로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를 여성신(女性神)으로 계시받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성신이 여성신이시기 때문에 성신을 받지 않고서는 예수님 앞에 신부로 설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신은 여성신이시기 때문에 위로와 감동의 역사(役事)를 하시는 것이며(고전 12 : 3), 또 해와가 지은 죄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기 위하여 죄를 씻는 역사를 하시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남성이시므로 하늘(양)에서, 성신은 여성이시므로 땅(음)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2. 로고스의 이성성상으로 본 예수와 성신


로 고스라는 낱말은 헬라어로서 '말씀' 혹은 '이법(理法)'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절 이하를 보면, 로고스는 하나님의 대상(對象)으로서 하나님과 수수적(授受的)인 관계의 위치를 취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로고스의 주체(主體)이신 하나님이 이성성상(二性性相)으로 계시므로, 그의 대상인 로고스도 역시 이성성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로고스가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지 않다면, 로고스로 창조된 피조물(요 1 : 3)이 또한 이성성상으로 되었을 수가 없다. 이러한 로고스의 이성성상이 하나님의 형상적인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분립된 것이 아담과 해와였던 것이다(전편 제1장 제1절 I).


아 담이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남성 즉 '생명나무'가 되고, 해와가 창조이상을 완성한 여성 즉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가 되어 인류의 참부모가 되었더라면, 그때에 하나님의 3대축복(三大祝福)이 완성되어 지상천국(地上天國)이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되었기 때문에 반대로 지상지옥(地上地獄)이 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인간들을 다시 낳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후아담(고전 15 : 45)으로서 '생명나무'의 사명을 가지고(계 22 : 14) 인류의 참아버지로 오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또한 여기에 후해와로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사명을 가진 인류의 참어머니가(계 22 : 17) 마땅히 계셔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타락인간을 다시 낳아 주실 참어머니로 오신 분이 성신(聖神)인 것이다.


3. 예수와 성신에 의한 영적 중생


부 모의 사랑이 없이는 새 생명이 태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성신의 감동에 의하여 예수님을 구주(救主)로 믿게 되면, 영적 참 아버지이신 예수님과 영적 참어머니이신 성신과의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하여 나타나는 영적 참부모의 사랑을 받게 된다. 그러면 여기에서 그를 믿는 성도들은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이 주입되어 새로운 영적 자아로 중생(重生)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영적 중생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영육(靈肉) 아울러 타락되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나아가 육적 중생을 함으로써 원죄(原罪)를 청산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의 육적인 중생에 의한 육적 구원을 위하여 필연적으로 재림(再臨)하시게 되는 것이다.


II. 삼위일체론


창 조원리에 의하면,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에 의하여 삼대상목적(三對象目的)을 이룬 사위기대(四位基臺)의 터전이 없이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는, 예수님과 성신도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으로부터 실체로 분립된 대상으로 서 가지고 서로 수수작용을 하여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함으로써,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때에 예수님과 성신은 하나님을 중심하고 일체가 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삼위일체(三位一體)이다.


원 래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신 목적은, 그들을 인류의 참부모로 세워 합성일체화시켜 가지고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를 이루시어 삼위일체가 되게 하시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만일 그들이 타락되지 않고 완성되어 하나님을 중심하고 참부모로서의 삼위일체를 이루어서 선의 자녀를 번식하였더라면, 그의 후손들도 역시 하나님을 중심한 선의 부부를 이루어 각각 삼위일체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3대 축복(三大祝福) 완성에 의한 지상천국은 그 때에 이미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여 사탄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이루었기 때문에, 사탄을 중심한 삼위일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도 역시 사탄을 중심한 삼위일체를 형성하여 타락한 인간사회를 이루어 놓은 것이다.


그 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과 성신(聖神)을 후아담과 후해와로 세워 인류의 참부모가 되게 하심으로써, 타락 인간을 중생(重生)케 하여 가지고 그들도 역시 하나님을 중심한 삼위일체가 되게 하셔야만 한다. 그러나 예수님과 성신은 하나님을 중심한 영적인 삼위일체를 이룸으로써 영적 참부모의 사명만을 하시었다. 따라서 예수님과 성신은 영적 중생의 사명만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성도들도 역시 영적인 삼위일체로만 복귀되어 아직도 영적 자녀의 입장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 러므로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을 중심한 실체적인 삼위일체를 이루어 영육(靈肉) 아우른 참부모가 되심으로써, 타락인간을 영육 아울러 중생케 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원죄를 청산하고 하나님을 중심한 실체적인 삼위일체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재림하시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타락 인간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창조본연의 사위기대를 조성하면, 그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3대 축복(三大祝福)을 이룬 지상천국이 복귀되는 것이다.

제4절        Missing text - Elucidation of Biblical Verses Which Support the Doctrine of Absolute Predesti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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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부활론 Chapter 5 Resurrection | 제7장 기 독 론 Chapter 7 Christology


sa.ffwpu.asn.au | 원리강론 (Wolli Kangron, 1966) | Exposition of the Divine Principle (1996 translation